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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소식〕“몸속의 사원”, 이화영 시인과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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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연기자
기사입력 2021-05-08

 

  © 한국공정문화타임즈



문단소식몸속의 사원”, 이화영 시인과의 인터뷰

 

 

당신이 사원을 나와 천천히 뒤편의 숲으로 들어가 / 바위에 엎드려 태아처럼 웅크립니다 / 그런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몸은 신열이 올라 / 우물을 퍼 올려 마른 정수리에 끼얹습니다 / 당신이 내 태아인 듯 양수가 부풀어 오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 영겁의 인연이라면 어느 전생에서는 내가 당신의 / 여식이거나 남편이기도 했을 겁니다 / 다가올 어느 사후에는 당신이 내 자식이기도 할 겁니다 / 그 사원은 내 자궁 안에 있습니다 / 사원과 몸을 바꾼 바람이 알려준 비밀입니다

- 시인의 시몸속의 사원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새침한 듯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있고 자신만의 고유한 향기를 품고 있을 것만 같은 시인, 시를 읽어보지 않아도 시인의 분위기에서 갓난아이의 배냇저고리에서 맡을 수 있는 그 따뜻한 모성의 사랑이 뚝뚝 흐를 것만 같은 시인, 지금까지 내가 지켜봐온 시인의 모습이다. 수수한 듯 세련되었고 세련된 듯 수수한 시인, 시인을 똑 닮은 피아노를 전공한 예쁜 딸이 있고 아무도 연주할 수 악보를 탄주하는 시인과 함께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며침향내나는 시인의 시 밭을 함께 걸어가 보기로 했다.

 

삶은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눈 같은 거라고, 그게 시라고...

       (시집침향自序 중에서)

 

 

 

 

대표시

몸속의 사원

 

당신과의 인연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이 된 후

내 몸속에 사원이 생겼습니다

사원의 누각에 걸린 종에는 당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가 바느질하듯 정으로 새긴 형상입니다

아직 아무에게도 누설하지 않았습니다

생이 비루하게 느껴지는 날이면 한동안 버려두었던

종채를 찾아 누각에 올라갑니다

당신의 음성이 종소리 되어 울려 퍼져 나간 자리마다

우묵한 우물이 파였습니다

우물이 찰박찰박 깊어질 때

벌레와 몸을 기댄 풀잎이 고요를 젖히며 일어납니다

당신이 사원을 나와 천천히 뒤편의 숲으로 들어가

바위에 엎드려 태아처럼 웅크립니다

그런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몸은 신열이 올라

우물을 퍼 올려 마른 정수리에 끼얹습니다

당신이 내 태아인 듯 양수가 부풀어 오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영겁의 인연이라면 어느 전생에서는 내가 당신의

여식이거나 남편이기도 했을 겁니다

다가올 어느 사후에는 당신이 내 자식이기도 할 겁니다

그 사원은 내 자궁 안에 있습니다

사원과 몸을 바꾼 바람이 알려준 비밀입니다

 

- 시집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중에서

 

 

 

피아노

 

당신은 여든여덟 개의 심장을 가진 나부裸婦

당신의 떨림이 허공을 흔들 때

파피루스에 흘린 기억들이 번개처럼 사방에 꽂히고,

흑백의 간극이 주는 목마름은

페달의 공명을 타고 숲으로 날아간다

 

당신 혈관 속으로 흐르는 무수한 음들이

내 심장에 희로애락을 무량하게 무늬 새긴다

당신 생의 페이지를 넘기는

내 손끝이 아릴 때

당신은 무슨 꽃을 먹고 사나 궁금했다

 

당신의 내부로 이르는 계단은 처음부터 미로였다

달세뇨, 다시 당신을 더듬어 가는 왼쪽 페달을 밟으면

그믐달이 치맛자락을 끌어 잡고 눈 내린 강변에 미끄러진다

 

당신의 내장을 긁어내면 돌돌 말린 오선지의 늪이 있어

아직 아가미 한번 벙긋하지 못한 물고기와

잎을 뚫고 나오지 못한 가시연꽃의 통증이

태초의 소리를 깨우고 있다

 

- 시집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중에서

 

 

 

100g

감정의 허기

 

마음을 무게로 표시한다면 몇 그램일까

 

마음은 감정이란 추 때문에 기울 때가 많다

 

닭 가슴살 한 덩어리는 100g이다

달걀 한 개의 단백가는 100인데

내게는 자꾸 100g으로 읽힌다

 

그가 한 줌 재로 왔다

적멸 100g

 

배를 깔고 엎드려 있으면

이대로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우울이 솔솔 올라왔다

 

내 중얼거림은

내게서 끝났다

 

손에 쥐어졌던 기억

달걀을 쥔 것 같아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 시집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중에서

 

 

: 안녕하세요. 참 분위기 있으세요.(웃음) 저도 위염과 위궤양을 달고 사는데요. 시인님께서도 위가 많이 안 좋으신가 보던데, 지금은 괜찮으신지요?

 

: 한창 나이 스무 살 때 꿈과 현실이 주는 갭으로 많이 헤맸습니다. 을지로와 시청 입구는 최루탄 연기가 끊이질 않았고, 안개 정국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빈속에 검은 사발커피를 마셨고, 해질 무렵이면 신촌역에서 기차를 타고 일영 주막촌으로 갔습니다. 80,90년대 경기도 일영은 청춘의 메카였고 고해소였습니다. 위는 회복과 재발이 무척이나 빠릅니다. 나이 들수록 재발은 잦고 회복은 느릿느릿 거북이 걸음입니다. 모두가 몸을 아끼지 않고 욕동에 버려둔 제 부실로 위는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하루 순하게 먹으면 하루 버텨주는 딱 그만큼 주는군요.

 

  

 

침향沈香

 

하롱베이를 다녀온 그가 팔찌를 내민다

촘촘히 몸 맞대고 있는 흑갈색 나무 구슬이 눈에 들어온다

상처의 진액으로 제 아픔을 동여매는 나무

 

농리를 쓰고 하노이 저자거리를 지나다가

한여름에도 차디찬 내 손끝을 생각한 마음이 애틋하다

희귀한 것들은 때로 모질다

집을 나설 때마다 휑한 손목에 팔찌를 끼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무가 나를 휘감는다

섬뜩하다

고즈넉하게 누워있는 검은 윤기가

이따금씩 눈빛도 낯익다

수천 년 전 혹 나는 침향나무가 아니었을까

내 앞에 한줌 구슬로 현신한 저 흑갈색 원형은

울울창창한 숲에서 나의 무심에 베인 그 나무는 아니었을까

 

늦은 밤 도마뱀의 꼬리 잘린 생각 하나 잡는다

향이란

한 방울의 아픔마저 거두어

끝내는 숨구멍을 온통 점령하는 것

 

조였던 팔찌를 벗는다

방향芳香을 끝낸 구슬이

살짝 부풀어 오른 손목에 자국을 남긴다

누워 있는 비로자나불이다

 

- 시집침향중에서

 

 

 

 

: 하롱베이를 다녀온 그가내민팔찌에서 비로자나불을 연상하는 시인님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집니다. 세상은 차가운 듯 따뜻하고 따뜻한 듯 차갑습니다. 삭막한 세상에 시인이 있어, 시인의 사랑이 가득 담긴 눈이 있어 세상은 살만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현재 시인님의 비로자나불은 무엇인가요?

 

 

: ‘비로자나불은 육신이 아닌 진리의 모습입니다. 끝없이 크고 넓어 어느 곳에서나 두루 가득 차 있으며 가변적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법신불(法身佛)입니다. 제게 있어 비로자나불은 하롱베이거나 침향이거나 시로 현현(顯現)하는 모든 메타포입니다. 상처의 진액이 옹이가 되고 옹이가 침향의 원료가 되는 과정을 알게 되면서 침향이야말로 비로자나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각

 

마트의 진열장 끝 모서리에서

노란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오이를 본다

 

그것을 집어 들자

손끝에 단단한 이물감이 느껴진다

화들짝 놀란 신경들

,

어깨에 걸친 민소매 원피스가 설핏 흘러내린다

 

오이를 눕혀 몸을 씻기고

상기된 얼굴로 칼을 찾는다

햇살과 달빛까지 치근거리게 했던 속살

얇게 베어진 살집 위로 물방울이 돋기 시작한다

늙어 이렇게 많은 물기를 지닌 것이 있을까

 

오이는 칼날 지난자리 아프다 하지 않고

고춧가루와 식초, 마늘과 어우러져

다시 싱싱한 꽃으로 피어난다

 

한때 노란 외꽃 모자를 쓰고

줄기에 푸른 덧이 나던 아픔을 공양하며

그대에게 빈 접시 하나 가득 꿈을 얹었으니

햇비에 잔뜩 부풀은 풋내 옮기며

몸속 어딘가로 사각 사각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마냥 흥겹기만 하다

 

철이 지날수록 속 깊어져

배냇니 같은 씨앗 단내 남기며

해거름 길게 드리운 그늘 맛을 가진

너는 언제나 낯선

수컷

 

- 시집침향중에서

 

 

: 사소한 대상에서 시를 이끌어내는 솜씨가 놀라운 것 같습니다.오이는 칼날 지난자리 아프다 하지 않고 / 고춧가루와 식초, 마늘과 어우러져 / 다시 싱싱한 꽃으로 피어난다

오이처럼 아파도 아프다 말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싱싱한 꽃으로 피어내는 사람들. 그 대표적인 분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인님의 어머님에 대한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요. 살아오시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런 분이 계신지요?

 

: 삶에서 특히나 딸은 어머니를 제외하면 할 말이 반으로 줄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지금도 세 번 참으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씀을 얼굴을 맞대고 있거나, 통화 중이거나 빠트리지 않고 하세요. 사람들 속에서 어울리고 조화를 이루려면 잊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면서, 참는 일이라는 것을 시간이 흐를수록 뼈저리게 느끼곤 합니다. 가끔 주신 말씀을 잊고 다 엎어 도로아미타불을 만들곤 하지만요. 엄마의 주름을 따라가 보면 엄마의 삶이 보입니다. 방사형, 일자형의 주름은 참고 인내하고 용서하며 본인의 이름을 잊고 다른 이름으로 피어난 엄마, 아내, 며느리라는 것을요.

 

 

 

 

372

 

사랑할 때와 임신한 여자의 아침 체온은 같다

성스럽기도 하고 외설스럽기도 해서 입 밖으로 뱉어내기 조심스럽다 북극 이글루에 사는 이누이트 족은 남자 손님이 찾아오면 하룻밤 부인을 내어준다 뱉은 입김 쩍쩍 얼어붙는 혹한 속에서 은수저에 상다리가 부러지는 밥상은 아니지만 지상에서 가장 붉은 심장을 보시한 뜨거운 온도를 내어주는 것이다 종족보존을 위한 이누이트 족 남자의 마음은 밤새 하얀 고드름 창이 되었을거다 강물이 찰랑거리고 흙이 부풀어 바람이 달아지는 봄이 오면 여자의 둥근 배 위에도 봄풀의 뿌리가 자랄 거다 북극 반대편 보일러가 지글 지글 끓는 방에 틀어 박혀 고독을 믿지 않는 그들의 생존 방식을 영상으로 답습하며 문득, 궁금하다

내 남자의 체온은 하얀 결정체 몇 개 쯤 맺혀있다 녹아내릴지

 

- 2009정신과표현신인상 등단작품

 

 

 

 

드리궁틸*에 가면

 

꿈꾸는 것은 절대 금지

타는 갈증 일어도 제대로 땅에 발을 붙여 벼랑길만 지나시라

곧 하늘 열리며 부르는 소리 들리면

허공을 끌어안은 몸이

한 때 야크였거나

그의 창자로 들어간 소금 한 줌은 아니었는지

잘 살피시라

 

저기 죽은 자의 살덩이 쪼아 먹는 독수리가

억겁을 돌다 내려와 탐하는 거라면

난자질로 삶의 끝자락을 마무리하는 온전한 순간을 즐기시라

 

환상의 기대는 욕심의 무게

목숨은 족히 한번 죽음으로 영원할진데

주린 배 채운 새

큰 날개 펼쳐 데려간 영혼이나 잠시 그리워하시라

바람길 따라 떠나야 할 몸

마지막을 지켜본 친구들에게 쓸쓸한 미소나 보내주시라

 

천장사여, 자 이제

내 두피를 벗기고 뼈와 살을 잘게 부수어

햇살과 바람에 알맞게 섞어

몰려드는 독수리 떼에게 한 점 남김없이 던져 주시길

 

목울대를 꽉 채울

딱딱한 부리에 찍혀 넘어 오는 소리 들으며

불온하게 맛보았던 이승의 꿈은 다 잊었다고

전해 주시라

 

 

*드리궁틸: 티베트에 있는 천장天葬

 

- 2009정신과표현신인상 등단작품

 

 

 

 

: 위에 소개한침향2(372, 드리궁틸*에 가면) 으로 2009년도에 등단하셨습니다. 시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알고 싶습니다.

 

: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일은 인간에게 부여된 권리와 의무라는 생각이 듭니다.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여유시간이 생기면서 운동과 독서에 치중했습니다. 문학사상을 20대부터 구독했는데 결혼하고 이사하면서 그 많은 분량의 책을 처리한 것이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문학사상을 통한 독서와 작가와의 만남은 저의 정신세계를 확장시켜 주었으며 지금 글을 쓰는 이곳으로 연계시켜준 스승과도 같습니다. 2008년에 우울증으로 쓰러지면서 거식증까지 겹쳐 먹지도 일어서지도 못했습니다. 먹는 대로 쏟아내니 다리에 힘이 풀려 이대로 끝나는구나 싶었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이 겁에 질려 뚝뚝 눈물을 떨구고 있었습니다. 뼈만 남은 몸에 충혈 된 눈과 자율신경은 무너져 사지를 쓰지 못하고 제 멋대로 흔들리고 있었으니까요. 엄마가 보내준 흑염소를 먹고 어떻게 일어섰는지 죽에서 밥으로 바뀌고, 거식증이 멈추면서 11년간 해오던 수영을 위 때문에 그만 두고 요가를 시작했습니다. 차츰 몸이 안정권에 접어들고 다리에 힘이 생겨 걸으면서 시를 잡았습니다. 시가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막연한 뿌리는 아마도 어릴 적에 쓰는 일이 놀이었던 습관에서 비롯되었지 싶습니다. 제 시 쓰기는 나쁜 기운에서 출발했습니다. 우울의 99%는 위에서 온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위와 관련된 우울을 담적증후군으로 보고 있더군요. 자아실현 동기부여가 된 그 기운이 무기력을 탈출하면서 시에 대한 간절함으로 이어졌습니다. 2009년 그 해 봄, 여름은 준비해온 시를 투고하고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이었습니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 초록색으로 봉인된 당선 통지를 받았습니다.

 

 

 

 

연꽃 이야기

산비탈을 일구는 엄마의 하루가 끝나고

포강을 지날 때면

뒤 따라 내려오던 산그늘도 연 밭을 기웃거렸네

상보 같은 이파리 빽빽하게 드리운 게 엊그제 같은데

비어있는 구멍마다 연옥이 가득하였네

오래전 포강에 홀린 언니

술 취해 헛발 디딘 땅꾼 아저씨

조용한 연밭에는

머리카락처럼 엉킨 파문이 계속 맴돌고 있었네

어떤 원혼의 노래가 못의 물을 쭉쭉 빨아올리며 흐르고 있을까

연잎위에 맺힌 물방울이 되고 싶었네

캄캄한 늪으로 또르르 떨어져 내리는 순간

엄마 몸베 쥐어 잡은 손에 땀만 흥건했네

가장 자리에 핀 연잎을 들쳐보았네

물 위에 뜬 이끼사이로 돋아난 수초가

산 아래서 뒷일 보던 엄마의 아슴한 그 곳 같았네

휘어진 뼈로 못 다 쓴 문장이 거기 새겨져 있었네

 

- 시집침향중에서

 

 

 

:오래전 포강에 홀린 언니, “휘어진 뼈로 못 다 쓴 문장이 거기 새겨져 있었네

시인님의 고향에 관한 이야기와 어머님, 언니 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실까요?

 

: 저는 전라북도 옥구군 나포면에서 태어났습니다. 다 자란 후에 나포(羅浦)라는 이름이 예뻐서 지금도 태어난 곳을 물으면 나포라는 지명을 꼭 밝힙니다. 이탈리아 나폴리를 부르는 발음 같아서요. 제가 태어난 나포는 금강을 경계로 장항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물이 오르면 찰랑이는 금강 뒤로 장항제련소 굴뚝에서 기세 좋게 오르던 연기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동네 뒤 한절이라는 이름의 작고 좁은 언덕길을 지나면 포강(연못)이 나왔습니다.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포강으로 봄이면 쑥을 캐러 갔었고 가을이면 흔들리는 갈대가 좋아 무거운 표정을 짓고 혼자 즐겨 가기도 했습니다. 겨울이면 온 동네 언니, 오빠, 동생이 모여 썰매를 탔고, 출출해지면 주위 나무를 모아 가져온 고구마와 옥수수도 구워먹는 진풍경이 있었습니다. 포강에는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는 개방성과 자유가 있었습니다.이곳에서 직접적· 간접적 경험이 글을 쓰는 귀한 질료가 되었습니다.

포강에 홀린 언니는 실재 존재했던 동네 언니입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 봄에 포강 주위에서 쑥을 캐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른들은 포강으로 쑥을 캐러가지 말라 당부했지만 포강은 은밀하게 손짓하며 불렀습니다. 그 언니 이야기를 들은 후 포강의 수초가 원귀로 보였고, 물에 비친 얼굴을 보다 홀린 나르키소스가 떠올랐습니다.

엄마는 작고 단아한 여성상의 표본이었습니다. 같이 자란 친구들이 기억하는 엄마입니다. 보름이면 동네 큰 마당에 모여 풍악을 울리며 어른들의 잔치가 벌어지곤 했는데, 사람들에 둘러 싸여 언뜻 언뜻 보이는 키 작은 엄마는 춤 새가 예뻐서 두둥실 떠다니는 보름달 같았습니다. 꾀를 모르는 엄마는 근면 성실했습니다. 노름에다 한량인 아빠를 대신해 인분(人糞) 지게를 지고 한절 너머 산밭으로 나르곤 했습니다. 뒤를 쫓아가던 단발 계집아이는 생생히 기억합니다. 웅덩이에 호박씨를 뿌리고 인분을 한바가지 주던 엄마의 맑은 표정을요. 호박이 자라면 호박고지를 만들어 호박버무리떡을 양은솥에 쪄내고 호박죽을 무쇠 솥에 쑤어 자식들 입으로 들어갈 때, 당신은 한 입 떼어먹지도 않고 바라보기만 하던 모습을요. 어릴 적 엄마가 자는 모습과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 여든 중반을 넘긴 엄마는 귀 멀고 눈 멀어 아기가 됐습니다. 이제야 드시는 모습과 잠든 모습을 보는 눈은 아프고 서럽습니다. 부모는 열 자식 돌봐도 자식은 한 부모 못 모신다는 말은 진리인 듯합니다.

 

 

청명 지나고

 

호박씨 묻은 자리에 싹이 돋으면

옆에 구덩이 파고 똥 한 바가지 부어주네

며칠 지나 내다보니 거름 흔적은 없고

비어있는 구덩이에 빈 그릇 하나 놓여있네

비 그치고 볕들기를 기다리네

싹이 자라고 또 자라네

염치없이 훌쩍 커버린 이파리 처녀 방둥이만 해져

어느덧 별 닮은 꽃까지 해롱거리네

꽃 진 자리 연두색 젖 몽우리 키울 동안 내내 부끄러울 거네

 

지치고 힘들 때마다 나도 옆구리에 빈 그릇 내미네

누군가 뜨거운 마음 한 바가지 부어놓고 가면

슬쩍 집어먹고 바람에 씻긴 덩굴손처럼 시치미 떼려하네

 

허기져서 나 먼저 채우려는 것이 아니네

호박잎 푸르게 올린 거름 되고 싶은 거라네

 

빗물에 밀린 흙이 스며드네

땅 냄새가 기막히네

 

내 안에도 빈 곳이 어찌 많은지

청명 지나면 여기 저기 또 슬픔이 괴네

 

- 시집침향중에서

 

 

: 허기져서 나 먼저 채우려는 것이 아니네 / 호박잎 푸르게 올린 거름 되고 싶은 거라네보기 드문 마음가짐인 것 같습니다. 시인님의 생활의 거름은 무엇이었는지요?

 

: 이 시의 주체는 어머니입니다. 제 생활의 거름은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의 활동무대인 들판의 바람과 풀과 대지 또한 제 거름입니다. 자연과 사물의 물질성으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상상력 또한 제 거름입니다. 자연은 어머니이며 그 내부에서 시작되는 의 밑거름은 어머니라는 고결한 거름이었습니다.

 

 

 

은빛 날개를 얻기 전에

 

어떤 벌레가 6년 썩은 나무 등걸을 파먹다가

한 보름 세상에 나와 목 놓아 울었다고

변신은 끔찍한 곳에서 일어나는 법이라네요

 

오직 푸른 나뭇가지 잎이나 갉아먹는 신세를

한탄하지 말아야 한대요

나무와 나무 사이를 부지런히 부스럭거리다

운 좋게 무서운 새를 피해 살아나려면

말랑한 몸통에 가시털이나 세워 봐 야죠

 

꾸물꾸물 배를 끌고 기어 다니는 일도

산 오르는 일과 같아서

몇 번씩 죽은 듯이 웅크리고 쉬어야 해요

등허리를 밟고 지나간

한여름 소나기와 팍팍한 바람과 잔뜩 달구어진 햇살도

잘 기억해야 하죠

 

눈부신 고치 속에서 맞이할 천형天刑을 생각해요

애벌레가 날개를 가지면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될 거라는 것

침묵의 노래를 은빛 비늘로 달고

햇빛에 반짝이며 견딜 수 있을 거예요

꼬불꼬불 숨겨둔 비단길 150 미터

허물처럼 이 땅에 생으로 남겨두고

날갯짓 힘차게 들어 올려

화려한 주검으로 향 할래요

 

 

- 시집침향중에서

 

 

 

: 운 좋게 무서운 새를 피해 살아나려면 / 말랑한 몸통에 가시털이나 세워 봐야죠말랑한 몸통에 가시 털을 세워본들 무서운 새가 꿈쩍이나 할까요. 그럼에도 은빛 날개를 얻기 위해서는 가시 털을 몇 번이고 세워보아야 하겠죠. 우리들은 자신이 잘 나갈 때엔 무서운 새가 되어 약자를 무시하거나 짓밟기 일쑤죠. 그러다가 큰 병이 걸리거나 죽음 직전에 이르러 그 모든 행위가 부질없었다는 깨달음에 이르기도 하는 것 같아요.류시화 시인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그런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시인님은 어떤 은빛 날개를 꿈꾸시는지요?

 

: 말랑한 몸에 가시 털을 세우는 행위는 살아내기 위한 끝없는 움직임입니다. 무엇에 대항하는 즉각적이며 동적인 방어수단은, 약자의 몸으로 세상을 살아내는 외향과 내향 사이 연대입니다. 무서운 새는 도처에 있으니까요. 은빛 날개는 이후의 동작입니다.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리는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위대한 힘은 말랑한 가시 털을 세우는 내밀성 속에서 상상되는 힘들이니까요. ‘은빛 날개의 꿈은 에피파니아(Epifania)의 시간입니다. 뮤즈의 출현을 기다리는 심각한 위험 앞에 노출된 행복의 공간이, 더 위험한 광야이기를 꿈꾸어봅니다.

 

코이

 

나는 작은 어항에서는 어른 손가락 길이만큼 자라

주인님 보시기에 흡족한 모양을 하죠

아주 커다란 수족관이나 연못에서는 아이 팔뚝만큼 클 수 있어요

강물에 나를 놓아주면 여한 없이

내 눈이 보이는 곳까지 등뼈를 늘리기도 하죠

나는 그릇 크기만 한 생각의 여행을 떠나곤 하죠

책가방 던져두고 꿈꾸는 아이처럼

밤이면 멀리 창밖으로 보이는 별을 몸 안에 담고 나면

어느새 입고 있는 사랑 한 벌 발견합니다

작은 어항에 들어온 이후

하늘을 본지 오래

물금이 줄 때마다 줄어드는 뼈들

숨 쉬는 순간까지 나를 늘리고 깎는 일로

내 아가미는 눈물 마를 날 없지요

처한 환경에 따라 몸을 달리한다는 말

참 좋지만

멀리 강으로 간 친구들

등 뼈 곧게 펴고 비단 지느러미 팔랑이는 소리

꿈결에 들려오면

혀가 오그라들 것 같은 병속의 병

천 년쯤 지나면 약이 될라나요

 

- 시집침향중에서

 

 

 

: 시의 내용과 상관없이 처한 환경에 따라 몸을 달리 할 줄 아는 코이가 부럽기도 합니다. 상황에 맞추어 몸을 달리 할 줄 아는 것이 더 슬픈지 처한 환경에 변신할 줄 모르는 옹고집이 더 슬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코이의 슬픔이천년쯤 지나면 약이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질문에 맞는 답변이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분재를 보면 몸이 뒤틀리고 숨통이 조여 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일본인들의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의 나무들은 본 태생의 뼈대를 유지하지 못하고, 휘어지고 꺾인 채 다른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나무의 잠행(潛行)의 꿈은 골절의 오류로 빈약한 상상과 인상들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환경에 따라 달리하는 코이는 뿌리 내린 이후 존재를 정의할 시간은 있었는지, 강으로 가고 싶은 유혹은 없었는지 온전한 휴식은 취했는지 궁금했습니다. 코이의 반립은 곧 인간의 숙제이기도하니까요.

 

 

 

쉘부르 우산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코끼리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때마침 모네의 꽃집을 지나는 내게 안경 쓴 코끼리가

분홍색 우산 하나 건네줍니다

옹기에 담긴 수련이 코끼리를 보고 윙크를 합니다

마스크를 한 코끼리 어깨에 빗물이 떨어집니다

웅덩이에 고인 물이 구부리며 꿈을 꾸자

빗물이 우르르 이웃 마을로 몰려갑니다

쌍꺼풀을 한 코끼리도 가고 분홍색 우산만 남았습니다

접으면 팔뚝만한 우산을 토트백에 넣습니다

해가 쨍쨍 내리 쬐는 날에도

구름이 몰려오는 날에도

바람 부는 날에도

쓸쓸한 날에도

나는 우산을 먹고, 입고, 신습니다

 

- 시집침향중에서

 

 

 

: 바람부는 날에도 / 쓸쓸한 날에도 / 나는 우산을 먹고, 입고, 신습니다시인님의 우산은 무엇인지요?

: ‘비오는 수요일에 빨간 장미를이라는 노래 가사에 우산은 없습니다. 가사 끝 귀절에 비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라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우산은 하나의 명제입니다. 우산은 벚꽃이며 첫사랑이며 키스입니다. 저는 우산에 가치를 부여하고 자랑스러워합니다. 우산이라는 질료를 벚꽃에, 첫사랑에, 키스에 비교하는 것은 우산이 포착한 자연적 행위들입니다. 오늘도 우산을 요리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비 개인 아침

 

남자예요

며칠째 내리던 비가 걷히고 어둑한

솔숲을 파고드는 저 빛은

 

겨울 바다의 수평선에 숨어

, , , 소리를 지르며 부풀어 오르던

욕망 감추고

습한 기운의 숲으로 향한 직립의 힘을 가진

 

물이 올라

발긋한 나뭇가지와

활처럼 단단히 휘어진 등걸 뒤로

일찍이 깨어났던

붉은 동백에게

때가 오면 있는 것 다 내려놓으라고

 

들판 자그만 둔덕을 파랗게 덮은 쑥이며 냉이며 벌금자리며

막 피어난 매화에게도

말해요

내려놓는 것이 사랑이라고

 

햇비로 씻긴 것 마냥

말끔해진 봄의 신부를 알아보고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당신은

바로, 남자예요

 

- 시집침향중에서

 

 

 

: 내려놓는 것이 사랑이라고알고 있으면서 왜 되지 않을까요? 허전한 마음은 내려놓기보다 자꾸만 무언가를 더하려고만 하고 있으니요. 내려놓으면 더 편할 수 있을 텐데요. 내려놓으면 모든 것들을 더 사랑할 수 있을 텐데요. 아직도 저는 제 마음 속에 털어내어야 할 것이 많고 많음을 느낍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마음 수양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 사랑과 행복은 동등한 관계일까요. 가끔 행복하면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에 빠지곤 합니다. 사랑과 행복은 동일한 연장선상이라는 생각입니다.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을 잊지 않는 데 있다파울로 코엘료 작연금술사, 문학동네, p.58. 위 문장처럼 보지 못하고 작은 소중한 것들을 마음에 새기지 않는다면 많은 사랑을 놓치는 불행한 삶을 살 것입니다. 마음 수양이 별거 있나요. 신뢰와 존경과 사랑이 함께 할 때 작은 행복에도 감사하는 자세가 기다리지 싶습니다. 제가 사랑전도사가 된 것 같네요.

 

 

 

소금여자 - 옌징의 여인들

 

남자 없이 소금을 만들어 온 것이 천 년

한 차례의 장마가 휩쓸고 가면 염전은 쓰레기 밭이다

란찬강이 찰랑대는 사월이 오면

여인은 눈물대신 계곡 아래 다시 축대를 쌓고 멀리 강가에서

돌과 진흙을 날라 발로 이기고 손으로 다져 염전을 만든다

등짐을 질 만한 나이가 되면 깊은 우물 같은 소금 창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할머니 어머니 그 딸이 굳어가는 어깨에 소금물을 지고

진흙물 빠질 날 없이 오르내린 아슬 한 축대 위

젖은 귀 밑 머리가 말라 붙을 쯤이면

아슬한 삶을 노을이 다독거리듯 천천히 갈 빛으로 덮어온다

달콤함을 거부한 그녀들의 삶에

십자 들 같은 염전이 쵸콜렛처럼 농밀해져

집으로 돌아가는 여인의 발꿈치에서 툭 툭 떨어져나간다

하얀 복사꽃을 닮은 도화 염을 거둬들이면

남자들은 여인들의 눈물을 싣고 일 년 양식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난다

히말라야의 햇살과 바람이 씨앗을 터뜨린다

억센 바람 앞에 웃자라지 못한 키 작은 풀들이 눈을 맞추며

여인과 등 굽은 인사를 나눈다

결혼 전날 까지도 신께 바칠 순백의 주물을 따 내리는 소금여자

상처 많은 삶에

눈부신 하얀 빛을 빌어야만 덫 나지 않으니,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그녀들의 넉넉한 마음이 있기에

히말라야는 오늘도 숨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 시집침향중에서

 

 

틈새

 

풀빛을 지닌 어느 집 대문 앞에 피어난 민들레였으면 좋겠어

못생긴 차양 아래 봄 햇살을 파는 노파의 빈 주머니라도 채워줄 씀바귀였으면 좋겠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거대한 담벼락을 싸는 담쟁이였으면 좋겠어 비 내리면 젖은 구두는 벗어버리고

가로수 분분한 낙화를 맨 발로 느끼고 싶어

때로 내 안의 것들이 자라기도 삭막한 세상

피워낼 것이 없어 벌거숭이인 빈 터에 나는 게으름을 놓아키운다

, 건반 위의 손가락이 쉼표 앞에서 잠깐 머무는 것처럼

햇살이 쉬어가고 개미나 벌레가 넘나 들 수 있는 틈이 그립다

마음의 틈이 키운 행복도 절망도 들풀같이 질긴 생명이었으니

참으로 빈틈이 없는 인생은 맛이 없다

 

- 시집침향중에서

 

 

 

: 참으로 빈틈이 없는 인생은 맛이 없다빈틈이 너무 많은 인생을 다시 살아내라고 한다면 거절하겠습니다. 적당한 빈틈은 오히려 삶의 의욕을 북돋우죠. 자신의 시에 100프로 만족하는 시인은 없을 것입니다. 시인님의 시나 삶에 채워 넣고 싶은 빈틈이 있다면, 평소에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신지요.

 

: 시와 빈틈에 대한 고민을 말씀을 드리기 전에 잠깐 제 출생에 대하여 언급하겠습니다.

제가 태어날 때 엄마가 출혈이 심해서 난산이었습니다. 보리쌀 두가마니를 주고 부른 의사는 자식이 몇이냐고 물었고, 엄마를 살리기 위해 뱃속 아기는 포기하기로 합의 했습니다. 의사는 집게로 아기를 집어냈습니다. 그 때가 3월이었습니다. 아기는 윗목에 밀쳐둔 채 3일이 지났는데도 죽지 않고 계속 울었습니다. 조그만 이마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집기 때문인지 양 이마는 움푹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제야 아빠는 미안한 마음에 면사무소에 가서 출생신고를 마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난 날보다 3일 뒤가 주민등록상 생일이 되었습니다.

제 출생이 고되어 그런지 가족력인지 몸이 무척이나 예민하고 스트레스에 노출이 되어있고 위경련이 잦았습니다. 성인이 되어 몇 번의 그로기 상황을 겪은 후 자신을 들볶는 일이나 상처에 대하여 깊게 고민하는 일들을 방하착(放下着) 하였습니다. 고민이 깊어지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신경계가 얽히면서 몸에 교란이 오는데 전기 고문처럼 전류가 흐르는 것 같고 진원지를 찾을 수 없는, 마그마 전조 같은 폭발 직전의 불안과 긴장이 몸을 흔들어 고통스러웠습니다. 무덤덤해지고 무디어지고 싶어 내려놓고 버리는 연습을 더 하였습니다. 말이 내려놓는 연습이지 포기에 가까웠습니다. 포기하다 보니 틈이 생기고 틈에 쉼이 있었습니다.이런 편안함도 잠시였고 써야 한다는 강박에 늘 시달리곤 합니다. 평온이나 편안함은 이생에서 포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포기할 때 돌을 뚫고 나온 생명체처럼 다른 기운이 몸을 타고 오는 감정의 연속기류를, 이제 포기하기보다 즐기며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스물여섯의 프로타쥬

 

내 나이 스물여섯, 3월의 눈이 내리고 후배의 소개로 첫 선을 보는 날이었다 출근길 가슴엔 증류수 같은 물방울이 뽀글뽀글 끓어올랐다 남자를 만나고 한 달 지나 붉은 벽돌집 레스토랑에서 친구 두 명을 불러 그를 소개시켰다 며칠 푸근하더니 칼바람 창을 때리는 오후였다 한 친구가 그에게 유혹의 눈길을 보냈다 빠르게 매듭짓는 성정 꿈틀 하더니 머리 속은 벌써 한 줄의 단어가 주홍 글씨처럼 새겨졌다 끝내 고개를 떨구며 번쩍하던 그의 눈빛을 보내고 나서 바람에 우는 전신주처럼 나는 떨었다

감꼭지 떨어진 이유를 꼭 말해야 아나 꽃샘추위 속 공원 귀퉁이 눈 녹지 않은 응달 햇살 한 줌에 기대어 핀 개나리를 보았다 허방 짚은 친구의 눈길 같았다 꽃살 스물여섯 기억의 문양을 문지르면 알러지처럼 돋아나는 음각 위로

그녀와 나의 하이힐 소리가 자꾸 뒤 섞인다

, , 또각, 또각

 

- 시집침향중에서

 

 

: TV 문학관의 한 편의 드라마를 본 듯합니다. 쓸쓸한 한때였을 것 같습니다.

 

: 그 시절의 치기어린 행동들이 수 십 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애틋하기도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뜨거운 나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분노와 배신감에 잠을 못 이루고 살이 내릴 정도로 힘들었는데 이것 또한 청춘이 지나야 할 터널이었습니다. 그 때도 지금도 친구를 미워하지 않았고 여전히 잘 지냅니다. 남녀관계는 인력으로 할 수 없는 영원한 숙제입니다. 우정을 택하고 짧은 만남의 이성을 버렸습니다. 여전히 기억은 생생합니다.

 

 

 

돌아오는 길

 

찻잔 속에서 매화 입이 벙글 어지고 있다

작년 이맘쯤 볼 살이 채 오르지 않은 것을

송이 째 따내 따끈한 물에 띄우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

 

네가 아름다운 건

좋은 때를 기다려 화려하게 몸 여는 것이 아니라

너를 버리듯 마음 녹여 향을 내는 것

 

찻물의 훈김이 가볍게 너울거리는 동안

삼월의 밤바람이 등짝에 달라붙는다

 

한 때는 쩍하니 갈라진 가슴 속에

불 속을 걷는 여자 하나 고집스럽게 들어 앉아있었다

휴지처럼 구겨진 여자 속의 또 다른 여자

 

들여다 볼 수 없는 우물에 우울 한 송이를 떨어뜨린다

해지기 전 돌아가는 것을 잊은 여자의 눈에

안부를 전해오는 노을

 

평온하게 찻잔을 든다

작년에 감춰두었던 봄이 찻물에 녹아

혀끝에 떨어지는데

 

- 시집침향중에서

 

 

 

:한 때는 쩍하니 갈라진 가슴 속에 / 불 속을 걷는 여자 하나 고집스럽게 들어 앉아있었다 / 휴지처럼 구겨진 여자 속의 또 다른 여자한때 불 속을 걷는 여자 하나 고집스럽게 들어 앉아 있었을 때가 오히려 그립기도 합니다. 시인님의 그 여자( “불 속을 걷는 여자”)가 궁금합니다.

 

: 유년시절 집 뒤란에 석류나무가 있었어요. 꽃도 많고 열매도 많아서 가족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어느 여름날 장독대 고추장이 더위에 넘쳐 옹기마저 붉어졌는데, 바로 위 정원의 석류나무마저 주황으로 붉어 뒤란은 온통 미쳐있었어요. 그들이 붉어질 때 뒤란은 주문에 걸린 듯 했습니다. 늦가을 석류를 열어볼 때마다 칸칸의 방마다 영롱하고 매끄러운 알들은 또 다른 붉은 방을 상상하게 하더군요. 너무 붉어 죽고 싶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있는, 그 때나 지금이나 여자는 충혈 된 눈으로 석류의 방으로 걸어갑니다. 석류는 병이고 미학입니다. 의 힘으로 여자는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통과 핍진逼眞함을 잃어가는 시절에 한 목소리를 들었다. 사정을 잘 아는구나! 이 생각이 저녁 안개처럼 평온했다. 사물의 정황과 관계의 내밀한 속내를 들여다보는 그녀의 찬찬함에서 온정주의가 피를 수혈한다. 그것은 단순한 들여다봄이 아니라 근원적인 굽어봄에 가깝다. 선물로 받은 침향沈香 팔찌를 차며 수천 년 전 자신을 침향나무로 환시幻視하는 스케일. 그것은 슬픔이 괴는존재의 여백과도 아득히 닿아있다. ‘생선과 장미를 하나의 미물薇物 속에 삼투滲透하는 마음이야 말로 그늘 맛을 감각하는 이화영의 눈썰미로 더욱 고양될 것이다. 일상의 다양한 층위를 두루 들여다보는 그녀의 삶에 즐김과 잉태의 온도인 372부는 실존의 온도로 자리 잡아 가리라. 그것은 자신만이 흔들 수 있는 시의 종소리! 그녀의 종은 시적 사유와 더불어 점점 울림이 자라는 새 몸을 얻을 터이다.(유종인 시인)

  

 

미궁의 흰소

 

당신은 기어이 암흑 속 미궁으로 들어갔군요

미끈한 엉덩이 아래 날렵한 발목을 가진

흰 소를 그 속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미궁의 가장 중심에 있다는 흰 소

울음소리만 아득하게 들릴 뿐

빛 한 점 없이 캄캄한

미궁은 벽 없는 벽으로 가로막혀 있다지요

그 속으로 들어갔다가 영영 길 잃고

나오지 못한 자들도 많다지요

흰 소는 일곱 송이의 꽃을 먹으며

미궁에 살고 있다지요

꽃들이 미로의 문장紋章을 물들이며 피어 있다지요

흰 소를 향한 당신의 사랑은

등 뒤의 사랑

눈으로 보는 게 아닌 마음으로 느끼는 것

그런데도 당신은 흰 소를 찾아 미궁으로 들어갔군요

당신이 흘린 눈물에 숲의 언어가 뒤척여요

흰 소를 찾은 자는

공작새 날개를 얻어 허공으로 오른다 하였지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영혼이 된다 하였지요

길 잃은 자들이 인광을 뿜어내고 있는 미궁에

나는 차마 못 들어가겠어요 무서워요

나무가 달을 무는 밤이면

불륜이 순정을 피워 올려 그 냄새

사방으로 물결을 일으켜요

그 순간만큼은 당신이 흰 소를 잊은 줄 알았어요

아무리 발을 동동 굴려도 나는 당신의 흰 소가 될 수 없네요

내게서 등을 돌린 당신은 초저녁별이 뜨기 전

향로와 비둘기 두 마리와 뱀을 여신에게 바친 뒤

흰 소를 찾으러 미궁으로 들어갔지요

흰 소의 울음이 이곳까지 들리는 밤이에요

미궁 앞에서 오늘도 나는 서성이다 돌아왔어요

 

- 시집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중에서

 

 

:흰 소의 의미를 여쭙습니다.

 

: ‘흰 소는 상서로운 길조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미궁의 흰 소를 쓸 즈음은 등단을 하고 시 쓰기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길을 잃고 헤맬 무렵이었습니다. 막연하게나마 시는 소비이며 만족이 없는 무화(無化)하기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궁(Labyrinthos)에 들어가기 위해 아리아드네의 실이 필요했습니다.아리아드네의 실은 시의 여정을 떠나기 위한 채비입니다. 미궁에 있는 흰 소를 만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장비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순간 미궁에 갇힐 테니까요.그러나 나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포기합니다. ‘흰 소를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저 미궁 앞에서 들릴 듯 말 듯한 흰 소소리를 듣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미궁 앞에서 나는 서성이며 흰 소의 울음소리를 확인하고 돌아 갈 것입니다. 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흰 소는 지상에 영원히 존재할 것이며, 나는 그러한 흰 소를 만나기 위해 부단한 여정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흰 소는 저의 시 쓰기 여정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루입니다.

 

 

: 시는 주로 언제 쓰시는지요? 특별히 시가 오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낮에 운동을 하거나 멍 때리거나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책을 보거나 시를 쓰려고 책상 앞에 좌정을 하면 졸음이 쏟아집니다. 낮에 잠깐 오수를 즐기면 밤을 꼬박 새게 되고, 낮이면 다시 시무룩 졸리고 이런 악현상이 계속 되풀이 되면 생활리듬이 깨져버립니다. 하루는 문단의 선생님께 조용히 저의 고민을 말씀드렸더니 잠이 안 오면 책 읽거나 시를 쓰면 되지 뭘 고민을 해라고 너무 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이 말씀하신 속뜻을 헤아려 낮, 밤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몸이 원하는 대로 따르기로 했습니다. 일정이 있는 날 잠을 설치면 괴롭기는 하지만 내 몫이려니 하고 버티고 수긍합니다. 새벽이면 머리가 맑아지고 민트처럼 싸한 느낌이 좋아서 제 밤을 낮과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가끔 오시는 그분을 영접하기 위한 제 몸부림입니다.

 

  

 

당신이 누구든

- 지렁이

 

비 그치고

축축한 콘크리트의 냉기 속

찢긴 옆구리로 기억이 새나간다

 

향기가 수상한 이 숲은 어디인가

홀려 홀려 이곳에까지 이르렀다

마로니에 꽃이 흘리는 흰 피를 느릿하게 문지른다

달빛에 섞여 번들거리는 몸에 고요가 내린다

땅의 음성이 희미해져간다 머리가 혼미해진다

한때 풍성했던 늪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내 살던 흙 속에서 깊이 잠들 수 있다면

 

부드러운 빵의 속살같이 찢어지는 풍요로운

죽음은 내게 주어지지 않는 걸까

이 숲의 모든 향들이 낮게 아래로 흐르는 소리

살고 싶어 땅을 팠다 일 밀리미터도 열리지 않는 딱딱한 땅

몸마디 붉게 부풀어 올랐다

 

하등인 내 머리 쪽에 둥근 관을 새겨 주신 뜻은

무던히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지령

 

태양이 몰려오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져야 한다 늪으로...

마로니에 꽃이 낙혈을 견딜 때쯤

나는 흙으로 돌아가 있을까

포복의 한 생에 덧붙여 말하노니

내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기 전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단말마로 나를 관통해줘, 당신이 누구든

 

- 시집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중에서

 

 

: 지렁이의 삶이든 인간의 삶이든 별반 다르지 않으며, “하등인 내 머리 쪽에 둥근 관을 새겨 주신 뜻은 / 무던히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지령, 삶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일상이며 무던히도 헤쳐 나가야만 하는, 무던히도 인내해야만 하는 것임을 잘 표현하셨습니다. 그런 견디는 삶 가운데에 당신이 누구든그것이 건 사랑이건 우정이건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 단말마로 나를 관통하는벼락같은 떨림의 시간이 제게도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 좋겠습니다. 살아오시면서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 단말마로시인님을 관통한 가장 큰 사건은 무엇이었을까요?

 

: 인간은 기억과 추억으로 삽니다. 살면서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나를 관통하는 벼락같은 떨림의 추억이 없다면 무슨 낙으로 살까요. 삶이 무의미해서 자주 끄집어내게 되는 어떤 공간에서의 기억은 나를 살게도 하고 죽음으로 밀기도 합니다. 장마가 끝난 한여름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물기 빠진 지렁이 한 마리가 콘크리트 바닥을 힘겹게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쪼그라진 몸이지만 번영의 시간을 보여주듯 제법 길고 굵었을 싶은 몸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렁이를 내려 보는 마로니에 꽃이 한꺼번에 종소리를 낼 것만 같았습니다. 느릿느릿 기어가는 지렁이의 생명도 그렇게 느릿느릿 빠져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조력 자살이 생각났습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단말마로 끝낼 줄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했습니다. 온몸으로 걸어도 그 자리인 듯 느릿느릿한 지렁이 걸음이, 이제 발을 땅에 디딘 내 몸 같아서, 이 자리에서 이대로 꺼져버리기를 바란 내 기도를 지렁이에게서 듣는 착각을 일으켰습니다. 오체투지 온 몸이 바닥이었던 그 한 때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저는 지렁이와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난해한 요리

 

그녀의 마지막은 난해한 요리다

 

홀씨처럼 넘나드는 호흡이 죽음의 그늘을

몰고 올 때,

네게는 없으나 내게 있는 결여를 구실로

쓸쓸을 넘긴다

뜨거운 양철 지붕 아래

나르시시즘에 젖은 해바라기가 서 있다

여전히 해를 향하고 있다는 건

아직 할 말과 쓸 말이 많은 이유일 것이다

촘촘히 박힌 까만 씨를 애써 다정으로 읽는 정오

날아든 까마귀가

해바라기의 눈 코 입 심장을 다 파먹어버렸다

무서운 속도로 자라난 내면의 우울이 새틴*처럼 빛이 난다

죽음을 불러들인 것은 해바라기일까

까마귀일까,

아니면 태양이 불러들인 한낮의 우울*일까

빈 해바라기 얼굴 가득 아무도 모르게 늙지 않는 색을 짓는다

지어놓은 색 중에서 제일 따뜻한 색을 꺼내는데

노릇하게 잘 구워진 도넛이 나온다

노란 빛깔이 행복을 가져온다는 기시감을 느껴 본 적은 없다

출구가 폐쇄된 투명한 둥근 식탁에서

말랑한 비유를 곁들인 늙은 저녁을 요리한다

 

* 새틴 : 견직물의 하나. 광택이 곱고 부드럽다.

* 한낮의 우울 : 앤드류 솔로몬 저.

 

- 시집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중에서

 

 

 

 

: 네게는 없으나 내게 있는 결여를 구실로 / 쓸쓸을 넘긴다시인들은 이 결여때문에 시를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찬찬하고 사랑이 가득한 성품이신 시인님의 결여는 무엇일까요?

 

: 주위에서 종종 시인을 선하고 착한 사람으로 치부置簿하는 경우를 봅니다. 저는 그 때 단호하게 말합니다. 시인은 결코 선인이 아니다. 자신의 결핍과 정체성의 혼란에서 방황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이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요. 제 경우가 그렇습니다. 상대를 탓하기보다 제 못남으로 돌리곤 합니다. 가만있어도 돌이 날아오는 억수로 재수 없는 날이 있고, 앞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눈발처럼 날아오는 청탁은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라는 결여를 로 치유합니다. 이열치열인 셈입니다. 제 결여는 입니다.

 

 

 

우울에 대한 서술

 

포도 알의 탐진 냄새가 너울거리는

칠월 한낮,

저 냄새라면 내 우울의 뿌리를 쑥 뽑아 올릴 수 있을 것 같아

들떠 홀로 중얼거리는 말

 

신생아는

산모가 느끼는 고통의 열 배를 받으며 세상에 나온 열매

뿌리까지 우레 같은 고통을 쓰느라 일그러진 포도나무

저 알들은 포도나무가 제 우울을 치유한 뒤의 달콤

 

내 속 방 한 칸

내가 들어갈 수 없는 곳

고통을 가두어 밀폐시키고 싶은데

얽힌 신경다발들이 흥건한 포도 냄새에 스파크를 일으킨다

 

한 송이 포도 알을 손에 쥐는데

이내 모래가 되어 스르르 흘러내린다

수확의 손들이 포도 알을 다 따 가고

 

밤이 오고 내일이 와도

포도 냄새는 여전히 무성할 듯싶은 칠월 한낮,

사방의 한가운데 서서

내 속의 방이 확장되는 소리를 듣고 있다

 

- 시집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중에서

 

 

 

: 우울을 치유한 뒤의 달콤한 시간은 살아도 살아도 멀기만 한 것 같습니다. 언젠가 그런 시간이 오기는 할까요?

 

: 보이지 않고 잡을 수 없고 느낄 수 없어서 인간은 갈망하고 욕동 하는 것 같습니다.

위 시는 제가 우울치료를 받은 경험으로 쓴 시입니다. 우울치료를 1년간 받으면서 상담도 겸 했었습니다. 초기에는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었는데 어느 단계에 이르니 몸이 안정을 찾고 불안도 없어지더군요. 그러나 우울을 치유한 뒤의 달콤은 없었습니다. 우울에 대한 서술에서 포도는 에로틱과 보혈사이 은폐된 상처의 미학입니다. 고통과 상처를 감수한 특별한 감수성은 쉽게 상처를 입습니다. 가장 깊숙한 아픔, 가장 뜨거운 상처야 말로 우울 뒤의 달콤함입니다.

 

 

 

한로寒露

 

열여덟 처녀는 툇마루를 꽃잎으로 수놓고 있었네

싸리나무 밀치며 사내가 늦은 오후를 끌고 들어왔네

사내의 긴 그림자가 마루에 걸터앉았을 때

언제 숨어들었는지 달아오른 감 하나

처녀의 수틀 속에 숨어들었네

 

저녁연기 건드리며 지나가는 달

삼단 같은 머리카락에 숨어

간혹 웃을 때 가늘게 접히는 눈 같기도 하였네

바람에 온기 들고 봄물 오르던 해

그를 반겨 연지 곤지 발랐네

 

홍옥 같던 사내

치매로 칠 년 전에 바람 따라나섰네

 

마당 가득 국화 내음 어지러운 날

사내는 감가지 꺾어 들고

노을을 켜는 마른 이파리 한 잎으로

일흔여덟 처녀 가슴에 진다네

 

- 시집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중에서

 

 

 

: 아버님의 죽음을 차분하게 시로 잘 풀어내셨습니다. 시집 곳곳에 어머님과 아버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느껴지는 시편들이 많습니다. 무척이나 효녀이신 것 같습니다.

 

: 엄마는 지난이야기를 저를 붙잡고 잘 풀어놓으세요. 어쩌다 만나면 10대에서 50대까지 이야기를 풀어놓고 다시 풀고 밤새 만리장성을 갑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은 동네 결혼을 하셨어요. 어느 날 설거지를 마치고 마루에서 수를 놓고 있는데 아빠가 사립문을 밀치며 들어섰습니다. 석양이 질 무렵이었는데 말없이 들어선 아빠가 잘 익은 감 가지를 엄마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감 가지가 혼인을 성사시키는 매개물로 알고 있습니다.

자라면서 저는 페미니스트가 됩니다. 어머니를 여성으로 보고 가부장도식에 철저한 아버지 에게 반기를 들게 됩니다. 어렵게 얻은 막내자식이었고 자랄 때 영악스러워 아버지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고 자랐지만 저는 어머니 편에 섰습니다. 저는 효녀가 아닙니다.

 

 

사이프러스

 

오는 소리도 없이

 

숲으로부터 맵찬 바람이 불어온다

 

겨울이 깊어가는지

 

한낮인데도 어둑어둑하더니

 

길 위의 죽음만큼이나 눈이 무진하게 쏟아진다

 

서늘한 오늘을 종이 삼아 몇 자 기별을 전한다

 

지는 소리도 없이

 

이파리가 질 때

 

생이 저만큼 멀어져가더라도

 

땅이 닿는 순간까지 생명을 담아,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 시집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중에서

 

 

 

 

: 실제로 시인님에게 한 달간의 일정이 주어진다면 어떤 곳을 순례자처럼 떠돌고 싶으신지요?

 

: 한 달 꿈같은 시간입니다. 정말 그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주어지면 혼자 여행한 적이 없어 갈지 의문입니다. 그렇지만 상상은 자유이고 빛이니 빛을 향해 나가볼까요. 저는 동유럽을 아직 못 갔습니다. 2018년에 그리스 발칸 6개국(그리스,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을 다녀왔습니다. 장소, 음식, 동행인 모두가 좋아서 여행 내내 행복했습니다. 다시 여행 기회가 주어진다면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동유럽과 스페인을 가고 싶습니다. 폴란드, 체코의 고색창연한 성과 건축양식들, 거리의 마로니에 나무와 중세문화 축제를 보고 경험하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스페인은 가우디의 숨결을 느끼고 싶고 구엘공원과 모세라트수도원도 보고 싶군요. 그리스에서 본 메테오라수도원은 경외스러웠습니다. 여행 중에 만나는 수도원은 우리나라 사찰이나 수도원과는 달라서 보고 느끼는 다름이 있어 좋습니다. 그리고 전부 맛나고 싸다는 과일을 맛보고 싶습니다.

 

  

 

몸이 바뀌는 시간

 

골목길에 들어서는 순간, 향기가 먼저

보슬보슬 내려앉고 있었다

비 맞는 라일락

잎잎이 가느다랗게 앓는 소리를 냈다

라일락과 허공 사이로 기타 소리가 빠져나와

내 어두운 빗장뼈를 열고 스며들었다

속에서 울리는 음률에 살결이 촘촘하게 떨렸다

걸음을 멈추고 나는 비의 악보를 품었다

 

공유하는 음악이 있는 사이여야 연인이라지

그 음악의 초원에서 사랑을 한다지

풀잎같이 흔들리며

자맥질하는 숨이 이슬같이 맺히며

서로의 호흡으로 悲歌를 부른다지

위험한 소원을 구름으로 풀어 허공에 놓으며

서로를 씻어줄 빗방울을 기다린다지

마침내 비가 如一하게 쏟아지면

서로의 몸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지

몸이 바뀌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둥근 음악처럼

 

- 시집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중에서

 

  

 

: 저도 시인님과 같은 생각을 자주 합니다. 자신의 고통과 상처는 자신만이 아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서로 몸을 바꿀 수 있다면 타인의 고통과 상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서로 포옹하며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고요. 몸이 바뀌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 둥근 음악의 시간을 서로가 잠시나마 공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몸은 그대로 있습니다. 저녁에 반성하고 아침에 바로잡고자 하는 계획이 작심삼일을 넘기지 못하는군요. 몸이 전하는 소리를 듣고 양수자세로 몸을 만나고 무게감 없는 가벼운 몸을 만나는 일은 매일이 축복이다. 몸이 바뀌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둥근 음악은 내 몸 속에 사원하나를 들이는 일입니다.몸의 복잡성도 어렵지만 사는 날까지 끌고 가야 할 몸의 욕구를 듣고 몸이 욕망하는 것을 제대로 응시하여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삶은 인간의 모든 욕망으로 시작하니까요.

 

 

 

 

나는 여전히 당신의 사마귀

 

늘 거기 있었다

 

언젠가 다른 풀밭을 향하여 튈 거라 그들은 수근거렸지만

생각과 사실은 비웃기라도 하듯 다른 레일 위를 달렸다

그리움은 순서 없이 찾아왔다

늘 거기 있었다는 듯

검은 포플러나무가 무서워 눈을 돌리면

희미하게 달무리가 보였다

비 내린 숲

그들에게 내가 읽힐까 두려웠다

탐진 고요 속 뛰는 가슴은 멈출 줄 몰랐으므로

 

많은 것들이 사라져가고

여유는 낄 자리가 없었다

흔적 없는 짐

그중에 내가 제일 무서웠다

나를 버리고 찾아오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몸을 구부리거나 펴는 동작을 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름의 덫에 걸리지 않는 일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절대온도가 있다면 그건 당신이다

나는 당신이 아껴둔 빵이며

궁극에는 당신을 즐겁게 먹어치우는 사마귀다

 

- 시집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중에서

 

 

: 그중에 내가 제일 무서웠다 / 나를 버리고 찾아오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 몸을 구부리거나 펴는 동작을 하며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 이름의 덫에 걸리지 않는 일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절대온도가 있다면 그건 당신이다 / 나는 당신이 아껴둔 빵이며 / 궁극에는 당신을 즐겁게 먹어치우는 사마귀다”, “이름의 덫은 어떤 덫이며,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의 사마귀일까요?

 

: 사마귀는 교배 후 암사마귀가 숫사마귀를 잡아먹는다는 설이 있습니다. 암사마귀는 알을 키우는데 필요한 영양분을 수컷으로부터 얻는데 그들의 생태계며 생존법인가 봅니다. 흔히 사랑행위를 먹는다로 표현을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의식주에도 먹는 것은 빠지지 않습니다. 사마귀의 교미를 티비에서 보고나는 여전히 당신의 사마귀의 모티브를 얻게 되었습니다. 생존과 사랑의 표현에서 사마귀는 한 덩어리며 온 가족이 한몸으로 밀고 가는 긍정의 공동체라는 생각입니다. 어버이 날 낳으실제 당신의 뼈와 살을 주고 죽음으로 가시니, 이 행위는 기존 학습과 관습의 틀에 박힌 이름의 덫에 걸리지 않으며 행하는 엄숙하고 유일무이한 내리사랑보시가 아닐까요.

 

 

: 침향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두 권의 시집을 출간하셨습니다. 이 두 시집을 통하여 시인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 침향은 어머니와 여성성을 상징하는 기호와 일상적인 삶 속의 죽음이 전반적인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는 상처와 우울과 죽음이 남겨준 의미와 주름의 속엣 말을 겨냥하고 있습니다.두 시집에 연이은 죽음의 메타포가 있군요. 죽음은 삶의 연장이 아닐까요.COVID-19 시대에 많은 죽음을 접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시인님의 앞으로의 계획과 확장하고 싶은 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이 자리를 마무리하면서 독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나 시인님의 문학에 대해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실까요?

 

: 2009년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침향,아무도 연주 할 수 없는 악보2권의 시집을 내며 다작은 아니지만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전자시집 [꽃을 새기다]를 출간했습니다. 문단의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저만의 작품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눈에 부족한 것투성입니다. 다듬고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은 시입니다. 제 시를 한 분의 독자라도 읽고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제가 추구하는 시 쓰기는 우물에 갇혀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것입니다. 깊이 보고 개성 있는 사유로부터 출발하여 다양한 현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시에 녹여보겠습니다.

 

 

 

꽃을 새기다

 

칼을 쓰는 하루는 무사히 지나지 않아도 좋다

 

꽃을 조각했다

신전의 텍스트는 키스

 

6초의 시선

허벅지 한 쌍을 전각箭刻했다

 

아이 우는 소리에 꽃모가지 진다

 

소리 내지 않고

달아나지 않고

흘러내리는 분홍 알레고리아

 

- 디지북스 작은 시집꽃을 새기다중에서

 

 

 

겨울숲 우화

 

암록의 허물이 얹어 있는 겨울 숲의 일이란

붉은 의심을 떠나보내고

시리도록 맑은 풍경을 비워두는 것이다

몸 하나 버릴 것 없이 온몸이 공양인 계절은

뿌리에서 불같이 타오르는 묵음 뒤로

지상의 배후는 사는 일이 차갑다

 

차가운 관능을 한 줄 문장으로 풀어놓았는지

저무는 산그늘이 검푸르다

 

낡은 슬픔으로 피어 있는

병 속의 마른 꽃들에게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나비 유충을 보낸다

목이 잘린 들의 핏기와 향이 사는 오래된 방

나비 유충은 날개를 펴보지도 못하고 죽어갈 것이다

어깨를 맞대고

꺼져가는 숨결을 어루만져주는 일도

실은 다른 이름의 부화라는 걸

이별은 알까

별조차 없는 어둠 속 천지에서

짝을 잃고 미쳐버린 나비 한 마리를 위해

결로의 아침을 비워둔다

나와 같고 나를 빨개지도록 썼고

축축하고 물기 있고 젖어 있는

 

- 시집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중에서

 

 

 

이재복 문학평론가가 시인의 시적태도는 늘 자신의 밖이 아니라 안을 주시한다. 자신의 내면에 은폐되어 있는 세계를 들여다보고 여기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인의 태도는 조용하고 꼼꼼한 성찰과 글쓰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듯이 시인의 시에서 나는 몽돌 같은 단단함과 피아노 건반 같은 유려함을 읽을 수 있었다.축축하고 물기 있고 젖어 있는나비인 시인의차가운 관능사랑다음 시집에서 어떤 날개를 활짝 펼칠 지, 시인이 연주할 다음 악보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봉지에 공기를 채워 다니는 사람이 있다. 그는 급작스레 숨이 막히는 사람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릴 때마다, 그는 봉지에 입과 코를 대고 숨을 몰아쉰다. 그가 봉지의 공기를 움켜쥐는 것을 느낀다. 기도하는 자세가 되었을 때, 그의 숨은 진정되고 달아오른 얼굴을 감싼 채 울음을 터트린다. 다시 봉지에 공기를 불어 넣은 그가 막다른 골목을 돌아 나온다. 그는 미궁 앞을 서성이다 돌아간다. 그의 중얼거림은 그에게서 끝이 난다. 얼음이 박힌 진눈깨비가 내린 길을 걷는다. "도망은 차가운 우유와 같아서 / 입술이 아닌 입속에 품어보는 말" 망설임으로 가득 찬 그의 "목덜미에 / 옥양목 목도리를 감아주고 싶"은 이유는, 그의 몸속 사원에서 날아오른 한떼의 나비가 우리들 가슴에 안착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이윤학 시인)

 

 

 

이화영 시인

2009정신과표현신인상 당선 등단

시집침향, 혜화당 , 2009. /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 한국문연, 2015.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전공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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